한국섭식장애정보

당신은 진단명이 아닙니다 - 피부병, 디스크, 비염이 어떤 사람의 정체성이 아닌 것처럼

내 진단명을 아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겪는 일이 나만의 이상한 문제가 아니며, 설명 가능한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단명이 나 자신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거식증, 폭식증, 폭식장애, 혹은 특히 ARFID, 건강음식집착증(Orthorexia) 같은 이름을 알게 되었거나 실제로 그런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그 진단에 딱 들어맞는 내가 갑자기 특별해지거나 남다른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단명에 대한 지식을 많이 모으는 것이 회복을 대신해주지도 않습니다.

최근 자주 언급되는 ARFID나 건강음식집착증에 대해 말하는 이유도, 새로운 이름을 단 특별한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주 어린아이에게도 섭식장애의 고통이 닥칠 수 있고, 그 고통이 기존의 거식증과 달라 단순한 편식이나 예민함처럼 지나쳐질 수 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사자가 자신의 경험을 공부하고 말하려는 시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단명과 관련 지식을 계속 모으는 일이 정작 자신의 두려움, 수치심, 분노, 회복에 대한 양가감정을 들여다보는 일을 피하게 만든다면, 그 지식은 회복을 돕기보다 병을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성찰을 계속 뒤로 미루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충분히 들 수 있습니다.

“내 정확한 진단은 뭘까? 진단서에 어떤 진단명과 F코드가 적힐까? 그게 진짜 나를 설명해주는 것 아닐까?”
“섭식장애 진단을 정식으로 받으면, 지금까지 내가 겪어온 경험과 고통도 정식으로 인정받는 것 아닐까?”
“나는 거식증도 있고 우울도 있으니, 이제 내 삶은 이 질병서사로 설명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질문이 생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회복을 위해서는, 그리고 정말 가치 있는 질병서사와 당사자 연구를 위해서는 더 불편한 질문도 필요합니다.

“나는 무엇이 두려워서 이 진단명과 정체성에 매달리고 있을까?”
“내 자존감 때문에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회복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런가? 내가 숨기고 있는 마음은 무엇일까?”
“나는 ARFID에 대해 위키피디아처럼 지식을 모으는 동안, 정작 식사 회복을 시도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은 계속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진단명은 놓치기 쉬운 고통과 위험을 알아차리기 위한 언어입니다. 그러나 진단명이 당신의 삶과 가치를 대신 채워주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ARFID가 아닙니다. 당신은 거식증이나 폭식증이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이렇게 있는 당신 자신입니다. 진단명에 매달리고 싶은 마음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중요한 것은 진단명을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단명이 설명하는 고통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과 고민을 감당하며 조금씩 빠져나오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